리서울갤러리, 이혜민 작가 열아홉 번째 개인전 ‘그리움’ 개최
리서울갤러리, 이혜민 작가 열아홉 번째 개인전 ‘그리움’ 개최
  • 박영선
  • 승인 2019.03.27 1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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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움, 이혜민 작가
그리움, 이혜민 작가
그리움, 이혜민 작가

리서울갤러리는 4월 3일부터 29일까지 이혜민 작가의 열아홉 번째 개인전 ‘그리움’을 개최한다고 27일 밝혔다.

소박하고 서정적인 색채와 표현으로 ‘그리움’을 그리는 이혜민 작가의 작품들은 이 시대 복잡한 삶 속에서 잃어버린 유년 시절 순수와 아름다움을 표현한 작품들이다. 유년 시절의 모습들, 고향, 꿈, 사랑, 슬픔, 추억들을 볼 수 있다. 향토적 색채와 질감, 세밀한 소재표현, 절제되고 완성도 높은 작품들이 승화된 미의식을 제공해준다.

리서울갤러리는 이번 전시에는 특히 봄소식을 전해주는 분홍빛 진달래가 들어간 그림이 많이 출품된다며 순수성과 감수성을 잃고 사는 현대 도시인들에게 미술 작품 감상을 통한 힐링의 시간이 되어줄 이번 전시회에 많은 관심을 부탁드린다고 밝혔다.

◇작가노트

“세상에 모든 사랑. 인연이란 이름으로 만나고 헤어졌던 모든 아름다운 것들은 그리움이란 이름으로 재회한다. 그리움은 마음의 본향이다. 그래서 다만 그리워할 뿐이다. 그릴 뿐이다” (2019년 3월 이혜민)

“저 소녀는 누구인가요?”

내가 가장 많이 받는 질문이다. 그림을 보자 마자 묻기도 하고, 한참 들여다본 후에 묻기도 한다. 나와 나누는 첫 대화의 시작으로 묻기도 하고, 언제고 만나면 꼭 한번 물어봐야겠다고 마음먹고 묻기도 한다. 하지만 난감한 것은 정작 나 자신이다. 가장 많이 받는 질문임에도 제대로 답을 해본 적이 없다. “작가 선생님의 어린 누이십니까?” 하고 물으면 그렇다고 한다. “어릴 적 동무입니까?” 하고 물으면 그런 것 같기도 하다고 한다.

어떤 이는 아예 누구일 것 같다, 단정하고 확신에 차서 유추한다. 멋들어진 작품 평을 곁들이면서 말이다. 한참 듣다 보면 그도 그런 것 같아 말미에는 “맞다”고 답하기 일쑤다. 어떻게 묻든 내 답은 듣는 이에겐 싱겁다. 저 그림 속 소녀는 누구라고 콕 집어 말해준다면 대화는 더 길어졌을 것이라 기대했을 텐데 말이다. 하지만 나는 작가로 가장 충실하게 답을 한 것이다.

그림 속 아이는 내 누이들이기도 하고, 어릴 적 동무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재밌는 것은 따로 있다. 내게 그림 속 아이가 누구냐고 물은 이들 뿐 아니라 소녀가 그려져 있는 내 작품을 본 거의 모든 이들은 그들 자신을 보고 있다는 사실이다. 내게 누구냐고 물은 이들도 정작 그 안에서 자신을 본다. 그림 앞에서 소녀이던 과거의 자신을 본다. 그들의 누이를 보고, 동무를 본다. 어떤 이들은 그림을 보자 마자 탄성에 가까운 감정을 드러내며 “어! 나다” 하고 즉각 반응한다. 저기, 내가 있다고 반가워한다. 그리고 금세 눈빛은 과거의 어느 한 날로 돌아간다. 한참 서 있으면서 그림 앞에서 떠나지 못한다.

내 그림에 취한 건지, 자신의 추억에 취한 건지 알 수 없다. 아니, 둘 다일 것이다. 아니, 둘 중 하나일 것이다. 아니, 어느 쪽도 상관없다. ‘그리움(情)’이라는 그림의 제목처럼 아득한 과거의 어느 날은 그것이 누구이든 간에 그립기 그지없을 테니 말이다. 지나간 시간은 아름답다. 빛난다. 소중하다. 그때는 몰랐다. 그 시간이 그다지도 아름다운 줄, 빛나는 줄, 소중한 줄 말이다. 그래서 그리운 것 아니겠는가.

나는 지나간 그 시간이 그립다. 아련하게 내 몸과 마음에 아로새겨진 시간이다. 내가 그리는 것은 소녀가 아니다. 지나간 그 시간에 대한 그리움이다. 내 그림 앞에 선 관객이 “저 소녀는 누구인가요?” 하고 또 내게 묻는다. 묻는 이의 눈에는 그리움이 한가득이다. 나는 답한다. “맞아요, 당신이 생각하는 그이가 맞아요.” 거창한 평론이 내게 무슨 소용일까. 내 그림 앞에서 “저기 내가 있어요!” 하고 말하는 관객의 말을 듣고 있는데 말이다. 바로 내가 그리고자 한 것이다.

쉬운 그림, 어려운 깊이

내 그림은 쉽다. 쉬운 그림이다. 어려운 그림이 아니다. 이런저런 해석을 내놓지만, 사실 나와는 조금 무관한 얘기다. 왜냐하면 작가인 내가 그렇게 쉽게 그리고자 한다. 어렵거나 힘을 주고 싶지 않다. 아는 이들만 보고 즐기는 그림이고자 하지 않는다. 어려운 이론으로 잔뜩 치장한 심각한 그림이기도 원하지 않는다. 나는 그렇게 작업하고 있지 않다. 내 작품은 관객에게 바로 전달되었으면 좋겠다. 내가 생각하는 작품의 생명력은 관객과 소통하는 데 있다. 공감을 불러일으키지 못한다면 어떻게 좋은 작품이라고 할 수 있을까. 홀로 독야청청 자기만의 예술 세계에 빠져 있는 것? 글쎄… 적어도 내겐 큰 의미를 부여하긴 힘들다. 나는 관객이 내 그림을 보자 마자 알아차려도 좋다. 비록 내가 의도한 주제가 아니더라도 관객 스스로 감동의 코드를 찾아내 즐겼으면 좋겠다.

사실 그림의 주제란 보는 이의 몫이다. 작가가 의도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의도한다고 해도, 또 의도한 대로 따라준다고 해도 관객은 이내 스스로 즐기고 느끼며 감동한다. 작가의 손이 닿지 않는 영역이다. 그리고 작가가 바라고 바라는 최상의 반응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이 지점에서 또 묻고 싶을 것이다. 무엇과 소통하고 싶은지, 무엇을 전달하고 싶은지 말이다. 꼭 전해야 하는 어떤 거창한 메시지를 가지고 있기에 어느 광고 카피처럼 쉽고 빠르게 알아채게 하고 싶은 거냐고 말이다. 내 작업은 크게 풍경과 인물로 나눌 수 있다.

그중 인물을 그리는 ‘그리움(情)’ 시리즈를 보자. 이 시리즈의 키포인트는 무엇일까. 바로 추억이다. 유년 시절의 순수하고 천진난만한 시간에 대한 이야기다. 어린 시절은 참 따뜻했다. 어른이 된 지금의 시간과는 완전히 다른, 한없이 순박하기만 하던 때다. 하얀 무명저고리를 입고 부끄러운 듯 물끄러미 앞을 바라보고 있는 소녀, 따뜻한 볕이 잘 드는 여느 집 흙 담벼락에 동네 강아지와 함께 서 있는 소녀가 있다. 엄마는 어디 가셨을까? 젖먹이 동생을 업고 있는 누이의 귓가에 꽂힌 진달래가 처연하다. 고사리 같은 두 손을 앞으로 가지런히 모아두기도 하고, 쑥스러운 듯 뒷짐 져 가리기도 한다. 아이들의 긴 소매와 진달래, 개나리로 보건대 아직은 쌀쌀한 기운이 채 가시지 않은 이른 초봄이다.

담벼락의 낙서와 앙상한 나뭇가지의 그림자가 황토 색감의 배경 위에 얹히며 서정적이고 목가적 풍광을 자아낸다. 향토적이되 지방색을 배제했기에 이 작품 앞에 선 관객은 누구나 자신의 유년 시절로 돌아가게 되는 것이 아닐까.

이런 보편적 추억의 정서가 어려워야 할까.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충만해지는 그 느낌에 어떤 이론이 더 필요할까. 작가로서 의문이 드는 지점이다. 나는 누구나 쉽고 편안하게 다가설 수 있는 그림을 그리고 싶다. 그 마음 하나로 붓을 든다. 그리고 내 그림을 통해 누구나 가지고 있는 그 옛날의 추억을 떠올리길 바란다. 그 추억은 이론으로 풀 수 없는 심연의 깊이를 지니고 있다. 나는 그저 그 문을 여는 문지기일 뿐이다. 그래서 나는 당당히 내 그림이 쉽다고 말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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